이 시기를 알지니~
정신을 차리라는 말씀이 아니신가?

"노력하는 연습을 하라" 하나님의교회 안상홍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벧후3.10ㅡ14 보존하시고 간수하신것은 쓰셔요? 안쓰셔요?

계14.1ㅡ5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십사만사천

의사는 수술하고 5년을 더 사는게 기적이라고 큰소리 치는데
 하나님의교회 안상홍께서는 영적의원으로 영생을 주신다는데 노력해야하지 않겠습니까?

마22.8ㅡ14 천국은 날마다 잔치가 펼쳐지는곳

천국잔치는 영원히 먹고 즐기는 곳

고전13.4 사랑은 오래참고 온유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교회 안상홍님께서 영적 수술을 해주실 때 딱 떼버리세요~~~







 


 


건빵은 네모반듯한 모양에 두 개의 구멍이 트레이드마크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마이클 잭슨의 트레이드마크는 문 워크가 아닐까.

어느 장소 하면 떠오르는 그 무언가는 그곳의 트레이드마크가 된다.

사람이나 상품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 운동선수가 가지고 있는 전매특허 등도 모두 트레이드마크다.

김연아 선수에게는 고난도 점프가, 축구선수 박지성은 체력과 팀플레이 능력이 트레이드마크라 하겠다.

이처럼 트레이드마크만으로도 누구 혹은 어디,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쉽게 인지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십자가다.

그래서인지 십자가는 교회의 트레이드마크라 불리고 있다.

지도에서도 교회를 표시할 때 집 모양 위에 십자가를 둔다.

그러면 누구나 그곳이 교회라고 인식한다.

 또한 어떤 사람이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있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기독교인이라고 여긴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교회의 트레이드마크로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십자가는 과연 교회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을까.


‘Baker's 신학사전’은 ‘십자가(CROSS)’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기독교에 대한 상징으로서 공식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콘스탄틴 시대부터였다.

초대 교인들에게 십자가는 말만 들어도 몸서리치는 것이었으므로,

십자가를 심미적으로 미화시킬 위험성은 전혀 없었다.”

(Baker's 신학사전, 도서출판엠마오)


 

십자가는 기독교인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예수님을 죽게 만든 사형 도구였다.

 말만 들어도 몸서리치는 것일 텐데 어떻게 그런 물건이 교회의 트레이드마크로 자리할 수 있단 말인가.

 또 다른 서적에서는 ‘십자가가 과연 그리스도인의 상징인가?’ 하는 화두를 던지며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공덕의 상징으로 생각지 않았고 오히려 사형틀이며 ‘부끄러움’(히12:2)이고 ‘저주받은 나무’로 여겼다.

그들은 오래된 거칠은 십자가를 신뢰치 않았다.” (로마카톨릭주의의 정체, 랄프 우드로우, 노아와방주)


초대교회 성도들은 십자가를 교회의 트레이드마크로 여기지 않았다는 증거다.

십자가를 교회의 상징으로 여긴 것은 콘스탄틴 시대 기독교가 타락하면서부터였다.

AD 431년 교회와 사무실 안에 십자가를 들이기 시작했고, AD 568년경부터는 교회 탑 꼭대기에 십자가를 세웠다.

 하지만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교회의 트레이드마크인 십자가는 척결의 대상이 되었다.


“교회와 국가의 권력자들이 파견한 대표단들이 건축가, 석공, 목수를 대동하고 지켜보는 가운데,

시내의 교회들에서 성화, 유물, 십자가 고상, 제단, 초, 다른 모든 장식물들이 제거되었고…”

(교회사 전집 8-스위스 종교개혁, 필립 샤프, 크리스천다이제스트)


스위스에 이어 십자가 등의 우상에 대한 개혁은 프랑스,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북아메리카 등지로 퍼져나갔다.

1985년에는 국내에서도 개신교 목사들 사이에 십자가 숭배에 대한 찬반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십자가는 교회의 트레이드마크인 양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십자가를 교회의 트레이드마크로 여기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당시 예수님께서 단두대에 돌아가셨다면 오늘날 교회 탑 꼭대기에 무엇을 두게 될까.

만약 예수님께서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면 십자가가 자리한 곳에 총들이 자리하고 있지 않을까.

교수형을 당하셨다면 밧줄이 걸려 있을 테고 말이다.

고대인들의 끔찍한 사형도구였던 십자가를 소중히 간직한 채 교회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여기고서 어찌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있겠는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보았느냐 유다 족속이 여기서 행한 가증한 일을 적다 하겠느냐 그들이 강포로 이 땅에 채우고 또다시 내 노를 격동하고 심지어 나무가지를 그 코에 두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도 분노로 갚아 아껴 보지 아니하고 긍휼을 베풀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큰 소리로 내 귀에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에스겔 8:17~18)


나뭇가지에 불과한, 아무것도 아닌 십자가를 하나님의 코앞에 두고 섬기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신다고 하셨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풀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잘 헤아려야 할 것이다.

 

출처는

https://www.pasteve.com/?m=bbs&bid=B2BibleCovenant&uid=4840

 

 

 

 



육체는 후패하나 영혼은 날마다 새롭게 되며 레벨이 올라갑니다~



 

 

 

출처는

http://www.gukj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703764

 


양산 하나님의 교회는

지난 1일 6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산막공단 일원에서 국토대청소를 실시하였습니다.

이들은 개인마다 준비한 쓰레기봉투와 집게로 쓰레기를 수거하고

 불필요한 현수막을 제거하여 약 6톤 가량의 쓰레기를 수거하였습니다.

 

 



어머니 뵙고 돌아오는길 가슴벅찬 마음을 가눌길 없어 소원을 담아 올립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출처는

http://ionyang.com/default/index_view_page.php?part_idx=66&idx=70085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총회장 김주철 목사)가

 새 언약 유월절을 기념해 전 세계 곳곳에서 자원봉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부터 국내 주요도시를 비롯해

미국, 영국,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브라질, 네팔, 페루,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헌혈운동, 환경정화, 소방서·노인요양원 위문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며 이웃에게 사랑과 희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출처는

http://www.dk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08180

 

 

 

포항 지역 ‘2017 전세계 유월절사랑 생명사랑 714차 헌혈릴레이' 행사가

지난 19일 경북 포항시 죽도동 소재 포항북구 하나님의 교회에서 진행됐습니다.

 

이번 헌혈행사에는

포항지역 하나님의 교회 성도 400여 명이

헌혈 릴레이에 참여해 이웃사랑의 열기를 더했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의 조건

누구나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행복을 원하고, 그 행복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소망한다. 단, 각 사람이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은 다를 수 있어서 행복의 조건이라고 하는 재물이나 명예를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도 자신은 행복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고, 반대로 누가 보기에도 어려운 형편의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행복하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나라별 행복 지수를 조사하면 부유한 나라보다 가난한 나라가 더 높은 순위에 오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행복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은 무엇일까?

영어로 행복(happiness)이라는 단어는 행운(good fortune)이라는 뜻에 가깝다. happiness와 happening(뜻밖의 일, 사건)은 각각 다른 뜻을 가지고 있지만 두 단어의 어원인 ‘hap‘은 우연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행복에 관한 명언들을 보면 행복은 사람의 의식적인 노력만 있다면 누구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중에 얻을 수 있는 우연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인터넷에서 행복의 조건에 대해 검색해 보면 특별한 방법이 있다기 보다는 인간 관계든, 운동이든, 식사든 욕심 부리지 않고 고루 하라는 일반적인 조언들이 대다수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행복의 조건

성경에서는 행복을 얻기 위해 어떻게 하라고 알려주고 있을까.


(신명기 10:12~13)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명기 33: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신명기에서는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켜야 행복을 얻을 수 있고, 그 행복은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하나님께 구원을 받아서 사망도, 고통도, 아픔도 없는 천국(요한계시록 21:1~4)으로 갈 수 있다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을까. 그 행복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규례를 제대로 지키는 곳을 찾아가면 된다.


(이사야 33:20~24) 우리의 절기 지키는 시온성을 보라 네 눈에 안정한 처소된 예루살렘이 보이리니… 거기(시온성에) 거하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허락하여 주신 규례, 절기를 지키는 시온으로 가야 구원을 얻을 수 있고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주의할 것은 사람들이 임의로 만들어 지키는 절기들을 지키는 곳이 시온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워주신 새 언약(예레미야 31:31, 누가복음 22:20)을 지키는 곳,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가 진정한 시온이다. 하나님의교회 성도들이 늘 행복하다 말하고, 항상 밝은 모습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께서 지키라 하신 규례들은 우리들을 힘들게 하려고 만드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복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사람들에게 행복한지 물어봤을 때 선뜻 행복하다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하나님의교회 성도들은 확신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규례를 지켜 구원받았으니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

 

 

 

 

 

 

출처는

https://pasteve.com/?m=bbs&bid=bcircles&uid=4833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라 하면 성경에 관심 없는 비(非)기독교인들조차 십자가의 수난을 먼저 떠올린다. 2천 년의 장구한 세월이 지났지만 예수님의 고통은 ‘인류를 위해 대신 피 흘리신 고결한 희생’으로 여전히 기억되고 있으며, 대가 없는 사랑의 대명사로 일컬어지고 있다.


예수님의 희생과 인류의 구원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희생을 감내하면서까지 예수님께서 인류에게 남긴 약속이란 과연 무엇일까? 2천 년 전 역사 속으로 들어가 확인해보자.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유월절을 앞두고, 성경의 기록대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 그리스도. 백성들은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환영한다.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소경과 다리 저는 자들을 고치시고 말씀을 가르치시며, 대제사장들은 물론 장로, 바리새인, 사두개인 들의 불법과 외식을 꾸짖으신다.


예수님 등장 후 곤란에 처하게 된 대제사장 무리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저에서는 ‘나사렛 이단’을 해하려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계략을 꾸미는 일까지 벌어진다.


그즈음, 열두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을 찾아가 예수님을 넘겨줄 방책을 의논한다. 예수님을 잡을 방법을 고심하던 그들은 기뻐하며 유다에게 은전 30냥을 건넨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이들에게 넘겨줄 기회를 엿본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누구든 예수의 거처를 알면 고하여 잡게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수난 전의 만찬


 유월절 당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월절을 지킬 장소를 예비하라고 명하신다. 말씀하신 대로 한 다락방에 자리가 마련되고, 저물녘에 이르러 예수님이 그리로 향하신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다.”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주시며 겸손과 섬김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은, 모두 둘러앉은 자리에서 떡과 포도주를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신다. “이것은 내 몸이요 이 잔은 죄 사함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는 말씀과 함께.


예수님은 이 자리에서, 사랑하는 제자 중 한 사람이 배신할 것과 모두가 자신을 버리고 흩어질 것을 미리 알리신다. 주를 위해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했다고 호언장담하는 베드로에게는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가장 처절한 고난을 앞둔 순간, 예수님은 철저히 고립되고 있었다.

 

고난의 시작


 예수님은 제자 몇 명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발걸음을 옮기신다. 잠시 후 닥칠 고난에 고민하시며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잠들어 깨어날 줄 몰랐다.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소서.”


예수님이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방울이 핏방울같이 된다.


같은 시각,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과 장로 들이 파송한 큰 무리와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다다른다. 유다는 자신이 먼저 입 맞추는 자를 잡으라고 군사들과 사전에 군호를 짜놓은 상황이었다. 각본대로 유다가 예수님께 나아가 “랍비여, 안녕하십니까” 하고 입을 맞추자 무리가 예수님을 사로잡는다. 제자 중 하나가 급히 검을 빼서 맞서지만 예수님이 만류하신다.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친다. 군대와 유대인 하속들은 예수님을 결박해 가야바의 장인이자 대제사장 중 하나인 안나스에게 끌고 간다. 심문을 마친 안나스는 예수님을 가야바에게로 보낸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거짓 증거를 찾는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제대로 된 증거를 찾지 못하던 중,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말하라”는 대제사장의 추궁에 예수님이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볼 것이다”라고 답하신다. 대제사장이 옷을 찢으며 소리친다.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증인을 더 요구할 필요가 없다.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다!”


무리는 “사형에 해당한다”며 맞장구친다. 예수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기도 한다.

 

“다 이루었다”


새벽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관정으로 끌고 가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고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한다”며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고소한다.


당시 유대 사회는 자치적인 사법제도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사형 집행권은 없었기 때문에 로마 총독의 승인이 필요했다. 빌라도가 죄를 찾지 못하고 예수님을 돌려보내려 하지만 무리는 “갈릴리에서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가르치고 선동한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빌라도가 유월절에 죄인 한 명을 풀어주는 전례에 따라 예수님과 죄수 바라바 중 누구를 풀어줄지 유대인들에게 묻는다. 바라바는 민란을 꾸미고, 민란 때의 살인죄로 붙잡힌 죄수였다. 유대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죄 없는 예수님 대신 극악무도한 살인자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요구한다. 예수님을 놓아주려 애쓰던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격앙된 반응에 두려움을 느끼며 결국 예수님을 재판석에 앉힌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유대인들의 요구는 그칠 줄 모른다. 이유를 물어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더욱 크게 고함칠 뿐이다. 민란이 날 듯하자 빌라도가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외친다. 백성들이 자신만만하게 소리친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시오!”


빌라도는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여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준다. 군병들은 가시로 관을 엮어 예수님의 머리에 씌우고 조롱하며 침 뱉고, 손바닥으로 때리고, 갈대로 머리를 친다. 희롱을 끝낸 병사들이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다시 예수님을 끌고 간다.


오전 9시경, 군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십자가는 중죄인을 다스릴 때 사용되던 사형 도구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십자가형을 가리켜 ‘죄인을 공개적으로 비하하기 위해 고안한 가장 끔찍한 죽음’이라 표현했다. 영국의 유대계 작가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는 ‘열사병, 굶주림, 질식, 충격, 갈증을 통한 느린 죽음’이라 기록했다.


극심한 통증이 예수님을 서서히 옥죈다. 행인들은 고통에 신음하는 예수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며 모욕한다. 대제사장들도 무리와 함께 “저가 남은 구원하면서 자기는 구원할 수 없구나.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고 조롱한다.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이 어두워진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내가 목마르다”고 이르신다.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댔다. 이를 받으신 후 “다 이루었다” 하시고 비로소 머리를 숙이신다.

 

예언의 역사 속에 감추어진 비밀, 새 언약


 언뜻 보기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으므로 구원의 계획이 실패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우연도 아니고 정황상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도 아니다.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보여주신 하나하나의 과정은 이미 창세전에 예정되었던 구원의 경륜이고,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였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부터가 그렇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은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스가랴 9:9)라는 말씀의 성취였다.


유월절에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나눠주시며 “이것은 내 살과 피”라고 언급하신 것에도 숨겨진 비밀이 있다. 이 역시 구약의 역사와 예언을 따른 것이다. 출애굽 당시 지킨 최초의 유월절에는, 일 년 되고 흠 없는 어린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예식이 있었다. 이를 행한 백성들은 어린양의 희생을 힘입어 재앙을 면하고 400여 년간 종살이했던 애굽에서 해방받았다. 이 같은 역사를 따라 이 땅에 ‘어린양’(요한복음 1:29)으로 임하신 예수님은 인류를 속박하는 죄와 사망의 사슬을 끊으시려 자신의 피에 죄 사함과 구원을 약속하셨다. 그 약속이 바로 새 언약이다(누가복음 22:19~20). 약속을 이행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의 피 흘리는 고통을 마다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때로부터 2천여 년이 지났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구약 성경에 빼곡히 기록된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이 패배가 아닌 승리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혈로써 맺어주신 새 언약의 유월절은 알지 못한다. 폐지되어버린 율법이라 치부하기도 하고, 진짜 중요한 것은 믿음이지 행위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그들의 모습에서 2천 년 전 유대인들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은 어째서일까.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너희를 위해 살이 찢기고 피를 흘려야 하는 십자가 고통을 참아내겠다’는 다짐과 의지가 깃들어 있다. 예수님의 가없는 사랑과 희생에 감복하면서도 유월절에 담긴 축복과 구원을 간과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인상 깊게 보면서도 유월절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이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예수님의 간곡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참고자료>
『예루살렘 전기』(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著)

 

 

 

 

 

 

 

네팔 히말라야 오지의 세르뚱 마을에서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가 ’70억 전도’ 라는 목표를 가지고 활동 한지 일년이 조금 넘었다.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어머니 하나님을 전한다는 것. 사람의 상식으로는 말도 안 되는 농담이라고 여길지 모르겠다. 이 세상에 기독교인만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종교의 자유가 제한 된 나라들도 있는데 하나님의교회는 무슨 자신감으로 70억 전도가 가능하다고 믿는 것일까. 하지만 하나님의교회 성도들은 이 목표가 이루어질 것을 확신한다. 그 이유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 예언의 말씀대로 하나님의교회 복음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 과정에서 하늘 어머니께로 돌아온 식구들의 사연 하나 하나가 다 감동적이지만, 그 중에서도 히말라야 오지 세르뚱 마을의 소식과 아마존 밀림의 소식이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지난 2015년 4월 25일,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 지역에 규모 7.5의 지진이 발생했다. 당시 카트만두의 상황도 심각했지만, 히말라야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세르뚱 마을은 지진으로 길이 무너져 완전히 고립 된 상황이었다. 그대로 시간이 지나면 식량이 없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던 상황에서 하나님의교회의 지진 피해 복구 활동, 식료품 지원 등으로 세르뚱 마을의 주민들은 더 이상의 피해 없이 무사할 수 있었다. 적은 인원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던 세르뚱 마을은 그 이후 어머니 하나님을 믿는 식구들이 점점 늘어났고, 예배소로 사용하던 공간이 비좁아서 새로이 성전 건축을 진행해야 할 정도로 많은 식구들을 찾게 되었다.

세르뚱 마을이 워낙 오지 마을인지라 성전 건축을 하는 데에도 식구들의 많은 땀과 정성이 필요했다. 건축 자재를 싣고 비포장도로를 오랫동안 달려야 했고, 차량이 가기 어려운 길에서는 짐 일부는 나귀에 싣고, 또 직접 들고 움직였다. 그동안 세르뚱 마을의 식구들은 건축자재로 쓰일 나무와 돌 등을 가져와 준비하며 연합으로 성전 건축을 진행했다. 히말라야는 고도가 높은 곳이라 일반 사람들이라면 산에 오르는 것조차도 힘든 곳이다. 그런 곳에서 건물을 손수 지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럼에도 네팔의 하나님의교회 식구들은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고 구원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손수 성전을 건축할 정도의 뜨거운 열정은 마을에서 그치지 않고, 식구들은 주변 마을과 이웃 나라에까지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있다. 네팔 세르뚱 식구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풍성히 내리길 하나님께 기도 드린다.

 

브라질 아마존 밀림의 추장까지

 

지구에서 가장 높은 곳인 히말라야에도 복음이 전해지는 한 편, 아마존 밀림에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고 있다. 브라질 마나우스 아마존의 따루마 지역 인디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고, 그 가운데 추장도 진리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동안 자신들이 지켜왔던 문화, 풍습, 우상들이 있었지만 성경에 있는 어머니 하나님을 알게 되고 나서는 그것들을 모두 버리고 하늘 어머니의 자녀가 되기로 한 것이다. 그 이후에도 다른 지역의 추장에게도 말씀이 전해져 인디언들이 있는 지역 구석구석에 하늘 어머니에 대한 말씀이 전해 질 예정이다.


(마태복음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모든 민족, 족속에게 복음이 전파 된다는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교회가 또 어디에 있는가. 오직 하나님의교회뿐이다. 전 세계 곳곳에서 생김새도, 문화도, 풍습도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교회 성도가 된 것은 하늘 어머니에 대한 진리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말하기를, 우리에게 하늘 아버지가 계시고 하늘 어머니가 계신다는 것. 다시 말해 우리가 하늘 아버지 어머니의 자녀라는 것을 성경에서 확인한 순간 믿지 않을 수 없었다고 입을 모은다.

하나님이 우리의 부모님이 되신다는 것은 너무나도 감사하고도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늘 아버지만 계신 것이 아니라 하늘 어머니도 함께 계신다는 것은 성경에서 확실하게 알려주고 있으나 제대로 알고 믿는 것은 하나님의교회뿐이다. 왜 그리도 많은 세계의 사람들이 어머니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교회로 나아오는 것일까. 성경으로 확인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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