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는 https://www.pasteve.com/?m=bbs&bid=bcircles&uid=4938

 

지난달, 태어난 지 10개월 정도 된 영국의 한 아기가 안타까운 죽음을 맞았다. ‘찰리’라는 이름을 가진 아기는 미토콘드리아결핍증후군(Mitochondria Deficient Syndrome)을 앓고 있었다. 미토콘드리아가 결핍된 찰리의 근육과 인체기관은 약화되었고 장기도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두뇌도 심하게 손상되어 호흡기 등의 연명치료 장치에 의존해 간신히 목숨을 이어갔다.


찰리의 치료를 담당해온 런던의 한 병원은 아기의 뇌 손상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부모에게 연명치료 중단을 권유했다. 영국 법원과 유럽인권재판소에서도 “찰리의 고통을 연장할 수 없다”며 연명치료 중단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찰리를 살려야 한다는 여론이 거세게 일어났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까지 찰리의 생명연장 중단 판결에 반대하면서, 아이의 생명을 둘러싼 논란이 커졌다. 전 세계에서는 찰리가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성금을 보내기도 했다.


이에 미국의 한 병원이 찰리를 ‘뉴클레오사이드 치료법’으로 고쳐보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찰리를 진단한 미국 의료진은 “너무 늦었다”며 살릴 방도가 없다는 소견만 밝혔다. 결국 영국과 미국 두 나라가 어찌해보지도 못한 채, 10개월 된 아기는 짧은 생을 미감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우리의 생명보존에 있어서 미토콘드리아가 갖는 중요성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미토콘드리아는 사람이 살아 움직이도록 에너지를 만들어주는 세포 속 미세기관이다. 몸 속으로 들어온 음식물을 통해서 에너지원인 ATP를 합성하는 역할을 한다. 미토콘드리아를 통해 세포가 살고 생명이 유지되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미토콘드리아는 우리 몸에서 기능이 상실한 세포를 죽이는 역할도 하는데, 이는 암세포로 발전하거나 다른 세포로 변이되는 것을 막는다. 또한 호흡을 관장하는 중심적 구실을 하며 당과 지방산의 산화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사람의 인체에는 약 1경 개의 미토콘드리아가 존재한다고 한다. 사람의 뇌와 근육, 장기가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세포 속 미토콘드리아는 끊임없이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덕분에 우리는 호흡하고 사고하며 행동하는 등 활기찬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미토콘드리아를 생명의 DNA라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생각하기 싫겠지만, 만약 나에게 미토콘드리아가 결핍돼있다면 먼저 산소 호흡이 힘겨워지고 뇌의 기능이 멈출 것이다. 근육, 장기, 신경계 부위에도 여러 병중이 나타나다가 끝내 숨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잘못된 신앙을 영위하는 그리스도인에게도 나타난다. 천국에 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하나님의 계명’이 결핍되었을 때 동일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계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지키거니와 그 행실을 삼가지 아니하는 자는 죽으리라 (잠언 19:16)
내 율례를 파하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지팡이로 저희 범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저희 죄악을 징책하리로다 (시편 89:31~32)


성경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에게 징계가 임하고 그 죄악을 물어 매질할 것이며 끝내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아무리 믿음의 연륜이 길다 해도 하나님의 계명이 결핍된 신앙은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마치 미토콘드리아가 결핍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신앙에서 결핍되어서는 안 될, 하나님의 계명은 무엇일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출애굽기 20:8)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누가복음 4:16)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하나님의 계명 중 하나는 안식일이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구원을 받았던 믿음의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안식일을 지켰다. 이천 년 전 구원자로 이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도 새 언약 안식일을 지키셨다. 예수님께서 친히 본보여주신 안식일 계명은 우리 영혼의 세포를 건강하게 살리는 영적 미토콘드리아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한1서 5:3)


천국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부디 돌연변이 세포와 같은 잘못된 계명을 지켜 영적인 찰리의 비극은 그만 멈추길 바란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고 약속하셨다(신명기 5:10). 하나님의 계명을 소중히 지켜서 영적인 뇌와 근육을 단련하여 천국에 무사히 입성하자.


<참고자료>
1. ‘英 희소병 아기 '찰리' 부모, 끝내 연명치료 포기…'미토콘드리아결핍증후군'이 뭐길래’, MBN뉴스, 2017. 7. 25.
 2. ‘미토콘드리아’, 두산백과

 

 

 

 

 

 

 

 

 


 


로봇이 개발되면서 인류의 삶은 굉장히 윤택하고 편리해졌다. 사람이 하면 오래 걸리는 일도 로봇은 실수 없이 순식간에 해낸다. 사람이 잘 때도 로봇은 피로를 느끼지 않고 묵묵히 지시받은 일을 해낸다. 로봇이 산업에 활용되면서 생산성은 크게 상승하고 반대로 불량률은 줄었다. 이렇게 로봇 기술이 발달하면서 처음에는 쇳덩이에 불과했던 로봇의 외형도 많이 변화됐다.


최근 개발자들은 인간과 유사한 로봇, 이른바 ‘휴머노이드’를 개발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태권브이나 건담 등 두 발로 서서 두 손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로봇이 휴머노이드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의 모습과 어설프게 닮은 휴머노이드를 보면 강한 불쾌감을 느낀다고 한다. 이를 가리켜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라고 한다.


불쾌한 골짜기란, 로봇을 향한 인간의 호감도를 나타낸 그래프가 꾸준히 상승하다 어느 순간 급격한 하향 곡선을 그리는 모양이 골짜기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인간이 로봇에 대해 느끼는 호감도는 로봇이 얼마나 인간의 모습을 닮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들은 인간과 흡사한 모습을 하고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로봇에게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 그 두려움의 수준은 기괴한 행동을 하는 좀비, 시체 등을 볼 때 느끼는 불쾌감이나 두려움과 비슷하다고 한다.


2011년 미국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한 연구팀은 불쾌한 골짜기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한 가지 실험을 했다. 실험에 참가한 20명의 사람들에게 실제 사람, 인간과 아주 닮은 모습의 로봇, 내부가 그대로 드러난 기계식 로봇이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참가자의 뇌를 자기공명영상장치(MRI)로 촬영한 결과 실제 사람과 내부 골자가 다 드러난 로봇의 인사를 받았을 때는 비슷한 뇌의 반응이 일어났다. 하지만 인간형 로봇이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자 뇌 반응이 달랐다고 한다. 이에 대해 연구진들은 로봇의 모습이 인간과 비슷하지만 행위는 자연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뇌가 혼란을 느낀 것이라 설명했다.


겉모습이 사람과 유사하다 해도 행동이 부자연스럽다면 본능적으로 불편함과 거부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살펴봤다.

이런 현상은 종교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선지자인 양 거룩하게 포장하고 있지만 그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종교인이 너무 많다. 더욱 무서운 점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선지자는 불쾌함만 일으키는 로봇과 달리 우리를 파멸로 이끌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로 미혹케 하니 인도를 받는 자가 멸망을 당하는도다 (이사야 9:16)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마태복음 15:14)

 


이 세상에는 선지자인 척하는 ‘가짜’ 선지자들도 많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해치는 존재들이므로 주의해야 한다. 그럼 그들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 로봇이 인간을 ‘어설프게’ 닮으면 불쾌감을 유발하듯, 가짜 선지자들도 영적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는 어설픈 모습을 가지고 있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마태복음 15:7~9)

 


그들도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 그 모습이 너무나 그럴싸해서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분간하기가 어렵다. 무엇으로 참과 거짓을 분별해야 할까? 바로 성경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나 사람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을 꾸짖으셨다. 아무리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무리 많은 기적을 행해도 그가 지키는 예배와 계명이 성경에 없다면 그는 참 선지자가 아니며 그의 모든 행위는 헛수고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을 그대로 준행하길 원하신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에 사람의 생각을 덧붙이거나 삭제한다면 구원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요한계시록 22:18~19).


하나님의 선지자라면 당연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는 아니다.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겉모습만 그럴싸한 거짓 선지자들에게 불쾌함은커녕 호감과 경외심을 표출하고 있다. 거짓 선지자를 따라가면 그와 함께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만큼, 참과 거짓을 올바로 분별하는 지혜가 꼭 필요하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태복음 7:15)

 

 

<참고자료>
‘로봇과 인간의 ‘불쾌한 골짜기’’, KISTI의 과학향기 칼럼

 

 

 

 

 

 

 

  파울 요제프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의 선전부 장관이었던 파울 요제프 괴벨스. 언론매체를 이용해 정치 여론을 조작한 최초의 대중 선동가로 알려진 그는 히틀러와 함께 나치당의 수뇌부로 활동하면서 여러 의미심장한 말들을 남겼다.

 


“대중은 한 번 말하면 거짓말이라고 하고 두 번 말하면 의심하지만, 세 번 이상 반복해서 말하면 의심하지 않는다.”

“대중에게는 생각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생각이라는 것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 한 말을 그대로 반복해서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선동은 한 문장으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반박하려고 할 때면 이미 사람들은 선동되어 있다.”

 


국민을 ‘길들여야 하는 짐승’ 정도로 여겼던 괴벨스는 사람의 심리를 이용하는 기술이 매우 탁월했다. 그는 모든 집에 라디오를 보급했다. 라디오를 통해 각 가정마다 나치의 연설이 흘러나왔고, 유대인들이 고리대금업으로 독일인들의 재산을 빼앗으려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TV를 통해서는 유대교의 전례에 따라 가축을 도살하는 장면을 의도적으로 내보내며 그들이 잔인하고 악랄한 민족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국민들의 마음은 서서히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덧 반유대주의를 외치며 앞집 사람도, 옆집 사람도 유대인 척결을 부르짖는다. 나치즘과 나치의 유대인 탄압 정책이 옳은 일이라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유대인은 독일인들에게 있어 극도로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었고, 이 증오는 이성을 마비시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분별력을 상실시켰다. 나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자민족의 우월감에 도취되었다. 그리고 죄책감 없이 유대인 대학살의 소식을 즐겼다. 괴벨스가 흩뿌린 독주에 정신이 혼미해져 정의의 탈을 쓴 악당과 한통속이 되어버린 것이다.


현대 인류사의 부끄러운 오점으로 남은 역사, 나치즘과 같은 거대한 집단 우월주의는 교회에도 존재한다. 사단은 교회를 저주의 소굴로 만들었다. 성경에 없는 일요일 예배, 크리스마스 같은 거짓 계명을 하나님의 계명인 양 둔갑시켰다. 거짓 계명이 오랜 세월에 걸쳐 반복되어 지켜지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진실처럼 믿고 따르게 되었다.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다니엘 7:25)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15:8~9)

 

 


하나님의 계명이 사단에 의해 짓밟힌 후 하나님께서는 친히 사람 되어 오셔서 사단이 만든 소굴의 정체를 밝히 드러내시고 참된 진리를 깨우쳐주셨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우고… (에스겔 34:11~25)

 

 


하지만 거짓이 진실의 자리에 들어앉아 똬리를 튼 후,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계명을 분별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이들을 배척하는 일에 앞장서기도 한다. 사단이 뿌려놓은 ‘다수 우월주의’라는 독주에 취해 한통속이 되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돌아보자. 나의 신앙은 주체적으로 결정한 것인가, 다수의 선택에 동참한 것인가? 내가 지키는 규례는 하나님의 가르침인가, 사람의 계명인가? 괴벨스의 전략에 휘말린 독일인들의 전철을 밟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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