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빵은 네모반듯한 모양에 두 개의 구멍이 트레이드마크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마이클 잭슨의 트레이드마크는 문 워크가 아닐까.

어느 장소 하면 떠오르는 그 무언가는 그곳의 트레이드마크가 된다.

사람이나 상품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 운동선수가 가지고 있는 전매특허 등도 모두 트레이드마크다.

김연아 선수에게는 고난도 점프가, 축구선수 박지성은 체력과 팀플레이 능력이 트레이드마크라 하겠다.

이처럼 트레이드마크만으로도 누구 혹은 어디,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쉽게 인지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십자가다.

그래서인지 십자가는 교회의 트레이드마크라 불리고 있다.

지도에서도 교회를 표시할 때 집 모양 위에 십자가를 둔다.

그러면 누구나 그곳이 교회라고 인식한다.

 또한 어떤 사람이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있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기독교인이라고 여긴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교회의 트레이드마크로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십자가는 과연 교회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을까.


‘Baker's 신학사전’은 ‘십자가(CROSS)’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기독교에 대한 상징으로서 공식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콘스탄틴 시대부터였다.

초대 교인들에게 십자가는 말만 들어도 몸서리치는 것이었으므로,

십자가를 심미적으로 미화시킬 위험성은 전혀 없었다.”

(Baker's 신학사전, 도서출판엠마오)


 

십자가는 기독교인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예수님을 죽게 만든 사형 도구였다.

 말만 들어도 몸서리치는 것일 텐데 어떻게 그런 물건이 교회의 트레이드마크로 자리할 수 있단 말인가.

 또 다른 서적에서는 ‘십자가가 과연 그리스도인의 상징인가?’ 하는 화두를 던지며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공덕의 상징으로 생각지 않았고 오히려 사형틀이며 ‘부끄러움’(히12:2)이고 ‘저주받은 나무’로 여겼다.

그들은 오래된 거칠은 십자가를 신뢰치 않았다.” (로마카톨릭주의의 정체, 랄프 우드로우, 노아와방주)


초대교회 성도들은 십자가를 교회의 트레이드마크로 여기지 않았다는 증거다.

십자가를 교회의 상징으로 여긴 것은 콘스탄틴 시대 기독교가 타락하면서부터였다.

AD 431년 교회와 사무실 안에 십자가를 들이기 시작했고, AD 568년경부터는 교회 탑 꼭대기에 십자가를 세웠다.

 하지만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교회의 트레이드마크인 십자가는 척결의 대상이 되었다.


“교회와 국가의 권력자들이 파견한 대표단들이 건축가, 석공, 목수를 대동하고 지켜보는 가운데,

시내의 교회들에서 성화, 유물, 십자가 고상, 제단, 초, 다른 모든 장식물들이 제거되었고…”

(교회사 전집 8-스위스 종교개혁, 필립 샤프, 크리스천다이제스트)


스위스에 이어 십자가 등의 우상에 대한 개혁은 프랑스,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북아메리카 등지로 퍼져나갔다.

1985년에는 국내에서도 개신교 목사들 사이에 십자가 숭배에 대한 찬반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십자가는 교회의 트레이드마크인 양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십자가를 교회의 트레이드마크로 여기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당시 예수님께서 단두대에 돌아가셨다면 오늘날 교회 탑 꼭대기에 무엇을 두게 될까.

만약 예수님께서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면 십자가가 자리한 곳에 총들이 자리하고 있지 않을까.

교수형을 당하셨다면 밧줄이 걸려 있을 테고 말이다.

고대인들의 끔찍한 사형도구였던 십자가를 소중히 간직한 채 교회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여기고서 어찌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있겠는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보았느냐 유다 족속이 여기서 행한 가증한 일을 적다 하겠느냐 그들이 강포로 이 땅에 채우고 또다시 내 노를 격동하고 심지어 나무가지를 그 코에 두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도 분노로 갚아 아껴 보지 아니하고 긍휼을 베풀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큰 소리로 내 귀에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에스겔 8:17~18)


나뭇가지에 불과한, 아무것도 아닌 십자가를 하나님의 코앞에 두고 섬기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신다고 하셨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풀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잘 헤아려야 할 것이다.

 

출처는

https://www.pasteve.com/?m=bbs&bid=B2BibleCovenant&uid=4840

 

 

 

 

 

 

출처는

https://pasteve.com/?m=bbs&bid=bcircles&uid=4833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라 하면 성경에 관심 없는 비(非)기독교인들조차 십자가의 수난을 먼저 떠올린다. 2천 년의 장구한 세월이 지났지만 예수님의 고통은 ‘인류를 위해 대신 피 흘리신 고결한 희생’으로 여전히 기억되고 있으며, 대가 없는 사랑의 대명사로 일컬어지고 있다.


예수님의 희생과 인류의 구원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희생을 감내하면서까지 예수님께서 인류에게 남긴 약속이란 과연 무엇일까? 2천 년 전 역사 속으로 들어가 확인해보자.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유월절을 앞두고, 성경의 기록대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 그리스도. 백성들은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환영한다.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소경과 다리 저는 자들을 고치시고 말씀을 가르치시며, 대제사장들은 물론 장로, 바리새인, 사두개인 들의 불법과 외식을 꾸짖으신다.


예수님 등장 후 곤란에 처하게 된 대제사장 무리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저에서는 ‘나사렛 이단’을 해하려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계략을 꾸미는 일까지 벌어진다.


그즈음, 열두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을 찾아가 예수님을 넘겨줄 방책을 의논한다. 예수님을 잡을 방법을 고심하던 그들은 기뻐하며 유다에게 은전 30냥을 건넨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이들에게 넘겨줄 기회를 엿본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누구든 예수의 거처를 알면 고하여 잡게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수난 전의 만찬


 유월절 당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월절을 지킬 장소를 예비하라고 명하신다. 말씀하신 대로 한 다락방에 자리가 마련되고, 저물녘에 이르러 예수님이 그리로 향하신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다.”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주시며 겸손과 섬김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은, 모두 둘러앉은 자리에서 떡과 포도주를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신다. “이것은 내 몸이요 이 잔은 죄 사함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는 말씀과 함께.


예수님은 이 자리에서, 사랑하는 제자 중 한 사람이 배신할 것과 모두가 자신을 버리고 흩어질 것을 미리 알리신다. 주를 위해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했다고 호언장담하는 베드로에게는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가장 처절한 고난을 앞둔 순간, 예수님은 철저히 고립되고 있었다.

 

고난의 시작


 예수님은 제자 몇 명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발걸음을 옮기신다. 잠시 후 닥칠 고난에 고민하시며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잠들어 깨어날 줄 몰랐다.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소서.”


예수님이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방울이 핏방울같이 된다.


같은 시각,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과 장로 들이 파송한 큰 무리와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다다른다. 유다는 자신이 먼저 입 맞추는 자를 잡으라고 군사들과 사전에 군호를 짜놓은 상황이었다. 각본대로 유다가 예수님께 나아가 “랍비여, 안녕하십니까” 하고 입을 맞추자 무리가 예수님을 사로잡는다. 제자 중 하나가 급히 검을 빼서 맞서지만 예수님이 만류하신다.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친다. 군대와 유대인 하속들은 예수님을 결박해 가야바의 장인이자 대제사장 중 하나인 안나스에게 끌고 간다. 심문을 마친 안나스는 예수님을 가야바에게로 보낸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거짓 증거를 찾는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제대로 된 증거를 찾지 못하던 중,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말하라”는 대제사장의 추궁에 예수님이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볼 것이다”라고 답하신다. 대제사장이 옷을 찢으며 소리친다.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증인을 더 요구할 필요가 없다.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다!”


무리는 “사형에 해당한다”며 맞장구친다. 예수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기도 한다.

 

“다 이루었다”


새벽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관정으로 끌고 가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고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한다”며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고소한다.


당시 유대 사회는 자치적인 사법제도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사형 집행권은 없었기 때문에 로마 총독의 승인이 필요했다. 빌라도가 죄를 찾지 못하고 예수님을 돌려보내려 하지만 무리는 “갈릴리에서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가르치고 선동한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빌라도가 유월절에 죄인 한 명을 풀어주는 전례에 따라 예수님과 죄수 바라바 중 누구를 풀어줄지 유대인들에게 묻는다. 바라바는 민란을 꾸미고, 민란 때의 살인죄로 붙잡힌 죄수였다. 유대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죄 없는 예수님 대신 극악무도한 살인자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요구한다. 예수님을 놓아주려 애쓰던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격앙된 반응에 두려움을 느끼며 결국 예수님을 재판석에 앉힌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유대인들의 요구는 그칠 줄 모른다. 이유를 물어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더욱 크게 고함칠 뿐이다. 민란이 날 듯하자 빌라도가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외친다. 백성들이 자신만만하게 소리친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시오!”


빌라도는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여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준다. 군병들은 가시로 관을 엮어 예수님의 머리에 씌우고 조롱하며 침 뱉고, 손바닥으로 때리고, 갈대로 머리를 친다. 희롱을 끝낸 병사들이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다시 예수님을 끌고 간다.


오전 9시경, 군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십자가는 중죄인을 다스릴 때 사용되던 사형 도구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십자가형을 가리켜 ‘죄인을 공개적으로 비하하기 위해 고안한 가장 끔찍한 죽음’이라 표현했다. 영국의 유대계 작가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는 ‘열사병, 굶주림, 질식, 충격, 갈증을 통한 느린 죽음’이라 기록했다.


극심한 통증이 예수님을 서서히 옥죈다. 행인들은 고통에 신음하는 예수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며 모욕한다. 대제사장들도 무리와 함께 “저가 남은 구원하면서 자기는 구원할 수 없구나.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고 조롱한다.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이 어두워진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내가 목마르다”고 이르신다.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댔다. 이를 받으신 후 “다 이루었다” 하시고 비로소 머리를 숙이신다.

 

예언의 역사 속에 감추어진 비밀, 새 언약


 언뜻 보기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으므로 구원의 계획이 실패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우연도 아니고 정황상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도 아니다.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보여주신 하나하나의 과정은 이미 창세전에 예정되었던 구원의 경륜이고,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였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부터가 그렇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은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스가랴 9:9)라는 말씀의 성취였다.


유월절에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나눠주시며 “이것은 내 살과 피”라고 언급하신 것에도 숨겨진 비밀이 있다. 이 역시 구약의 역사와 예언을 따른 것이다. 출애굽 당시 지킨 최초의 유월절에는, 일 년 되고 흠 없는 어린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예식이 있었다. 이를 행한 백성들은 어린양의 희생을 힘입어 재앙을 면하고 400여 년간 종살이했던 애굽에서 해방받았다. 이 같은 역사를 따라 이 땅에 ‘어린양’(요한복음 1:29)으로 임하신 예수님은 인류를 속박하는 죄와 사망의 사슬을 끊으시려 자신의 피에 죄 사함과 구원을 약속하셨다. 그 약속이 바로 새 언약이다(누가복음 22:19~20). 약속을 이행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의 피 흘리는 고통을 마다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때로부터 2천여 년이 지났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구약 성경에 빼곡히 기록된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이 패배가 아닌 승리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혈로써 맺어주신 새 언약의 유월절은 알지 못한다. 폐지되어버린 율법이라 치부하기도 하고, 진짜 중요한 것은 믿음이지 행위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그들의 모습에서 2천 년 전 유대인들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은 어째서일까.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너희를 위해 살이 찢기고 피를 흘려야 하는 십자가 고통을 참아내겠다’는 다짐과 의지가 깃들어 있다. 예수님의 가없는 사랑과 희생에 감복하면서도 유월절에 담긴 축복과 구원을 간과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인상 깊게 보면서도 유월절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이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예수님의 간곡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참고자료>
『예루살렘 전기』(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著)

 

 

 

 

 

 

 

 

고발 방송의 함정

최근 먹거리 고발 방송에서 대왕 카스테라에 대한 내용을 다룬 적이 있다. 제작진은 세 곳의 매장에 잠입해서 대왕 카스테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취재했는데, 매장에서 카스테라를 만들 때 사용하는 재료가 매우 좋지 않다고 방송에 내보냈다. 생 달걀이 아닌 보존 기한이 긴 액상 달걀을 사용한다거나, 버터가 아닌 식용유를 대량 사용한다거나 하는 내용이었다. 방송은 마치 식용유나 액상 달걀을 사용해서 만든 카스테라는 먹을 수 없는 음식인 것처럼 이야기 했다.

방송이 나가고 다음날 대왕 카스테라를 찾는 손님은 눈에 띄게 줄었다. 한 매장 주인은 방송 후에 매상이 90% 가까이 떨어져서 오히려 장사를 하는 것이 손해라 폐업을 고려하고 있다고도 말했다. 인터넷에는 해당 매장을 운영하는 사람이나 아르바이트생이 억울하다고 주장하는 글이 여러 개 올라왔고, 실제 매장 앞에 ‘좋은 재료를 가지고 양심적으로 만들고 있다’는 문구를 써 붙인 곳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이미 사람들의 마음은 돌아섰고, 지금은 지역 곳곳의 매장들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방송에서는 빵을 만들때 식용유를 사용하면 큰일 날 것처럼 이야기 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음식을 만드는 데 사용해도 문제가 없는 재료들을 사용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액상 달걀 역시 껍질이나 위생 적인 면에서 생 달걀보다 나을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비양심 적으로 운영하는 매장은 일부일 뿐인데, 방송은 모든 매장이 좋지 않은 것처럼 말한다. 이 방송은 예전에도 여러 업종을 다루었고 문제 삼았는데, 이 때문에 업종 자체가 흔들리거나 무너진 경우도 꽤 있다고 한다. 말로는 고발 프로그램이라고 하지만 정말로 양심적으로 운영하는 업주까지 위협하는 프로그램이라면 앞으로도 논란은 계속 될 것이다.

 

오해 받는 예수님과 초대 하나님의교회?

 

방송이라 해서 모두가 사실이고 정답은 아니다. 악의적인 편집에 의해서 부풀려지거나 왜곡 되는 경우도 많다. 당하는 사람은 억울하지만 아무리 하소연해봐도 이미 사람들은 떠난 뒤다. 이런 악의적인 소문들이 만들어지지 않았으면 하지만 나쁜 말일 수록 더욱 빨리 퍼지기 마련이다.

이천 년 전 예수님도, 그를 따랐던 초대 하나님의교회 성도들도 당시에는 억울한 누명을 쓸 수 밖에 없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모습이었다는 것에 대해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이 될 수 있는가‘ 하며 핍박하였고, 부활하신 것에 대해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소문에 더 집중하였을 것이다. 심지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새 언약 유월절 예식에 대해서 ‘식인한다’는 소문까지 돌았을 정도이다. 단지 성경의 말씀 따라 행했던 내용들이 다른 사람들은 악의적인 소문만을 듣고 제멋대로 판단했던 것이다.


(마태복음 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

내가 보고 듣고 있는 것이 오해가 없는 사실이라 장담할 수 있을까. 혹시 다른 사람들의 악의적인 소문을 듣고 편견을 가지고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도 마찬가지로 참 하나님을 찾는 과정에서 온갖 악의적인 비방이 가득하다. 예수님 때와 똑같이 사람이라 비방하고, 자신들과 다르다고 비방하며, 성경을 본다고 비방한다. 오해하는 시선을 사실인 것처럼 주장한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없애려면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 한다. 모든 일에 있어서 ‘팩트‘를 확인하고 판단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나아가는 과정에서 팩트를 확인하려면 성경을 보면 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그대로 성경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팩트, 성경을 통해 올바른 길을 찾아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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