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교회에서 성경상식 배워볼까요?

오늘은 아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때
 회중들이 한목소리로 외치는 아멘.
아멘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아멘은 히브리어로 ‘확고하다, 후원하다’라는 말에서 파생되었다. 동사는 ‘확실하다’, 명사는 ‘진리’,부사는 ‘참으로, 진실로’, 감탄사는 ‘그렇게 될지어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원어인 히브리어를 번역할 때 음을 그대로 차용하여 헬라어, 영어, 한글 등의 성경에도 ‘아멘’으로 기록되어 있다.


교회 지도자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중간 또는 끝맺을 때 회중들이 외치는 아멘은 ‘기도한 내용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는 뜻이며, 설교할 때의 아멘은 ‘말씀에 동의한다’는 의미다. 찬송을 마친 후 아멘 하고 외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찬송의 진실함’을 고백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말에 동의할 때, 맹세와 서약을 할 때, 예언에 대한 확신을 나타낼 때도 아멘을 사용한다.


아멘은 성경을 통틀어 50구절에 걸쳐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한 교훈을 하실 때도 끝에 아멘을 하셨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실 때 자주 사용하신 ‘진실로’의 원문도 아멘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태복음 6:9~13)


구약시대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율법을 백성들에게 반포할 때 백성들로 하여금 아멘 할 것을 요청했다.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지니라 …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명기 27:15~26)


이스라엘의 2대 왕 다윗이 솔로몬을 후계자로 세울 것이라고 말했을 때 다윗의 호위무사였던 브나야는 아멘을 외치며 그에 동조했다.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왕께 대답하여 가로되 아멘 내 주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오며 또 여호와께서 내 주 왕과 함께 계심같이 솔로몬과 함께 계셔서 그 위를 내 주 다윗왕의 위보다 더 크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열왕기상 1:36~37)


사도 바울은 로마, 고린도, 갈라디아, 에베소,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거나 마무리하는 인사를 하며 자주 아멘을 언급했다. 다음은 로마 교회에 보내는 편지 서두 부분이다.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로마서 1:25)


사도 요한도 하나님께 계시를 받아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며 첫 장과 마지막 장에 예언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는 의미의 아멘을 했다.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요한계시록 1:6~7)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요한계시록 22:20~21)

 

하나님의교회에서 성경상식에 대해 배워보시니까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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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물에 빠져 의식을 잃은 남성을 근처 야영객들이 합심해서 구조했다. 다급한 순간 전직 물리치료사, 간호사들이 망설이지 않고 적극 나서 살려낸 것이다. 이 환자는 호흡도 없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청색증이 온 상태에서도 시민들이 합심해서 구조한 덕분에 결국 깨어날 수 있었다.


한편, 화물차에 깔린 40대 여성을 지나던 시민들이 합심해서 구조해낸 사건도 있다. 제동장치를 채우지 않은 1톤 트럭이 비탈길에서 미끄러졌다. 매장까지 돌진한 트럭은 유리창을 받고서야 멈춰 섰지만 여성은 트럭 밑에 깔려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트럭을 들어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새 트럭 주위엔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고 꼼짝 않던 트럭은 점점 움직이기 시작했다. 피해자는 골반이 골절되는 중상을 입었지만 시민들이 합심해서 신속히 구조한 덕분에 살 수 있었다.


이처럼 한 생명을 구한 미담들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한다. 온갖 흉악한 범죄가 난무하고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한 요즘 시대에 자신을 희생하여 남의 생명을 구조한 일은 참으로 숭고하다. 만약 이들이 위급한 상황을 보고도 내 일이 아니라며 외면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미뤘다면 응급환자들의 생명은 어떻게 됐을지,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구조란 ‘재난을 당하여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는 일’을 뜻한다.

사실 사고를 당할 뻔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구에 사는 모든 인류가 천상에서 지은 죄의 삯으로 영적 사형선고를 받고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로마서 6:23). 누구 하나 예외 없이 태어난 순간부터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인 70억 모든 인류가 구조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셈이다.


언젠가는 가야 할 내세를 위해 인류는 보이지 않는 존재에게 구조 요청을 하기 시작했다. 현재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 정도인 약 24억 명 정도가 기독교를 믿고 있다. 신앙인이 24억 명이니 목회자는 또 얼마나 많을까. 그러나 무서운 것은 이 중에서 인류를 구조할 참 목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세상 끝에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법이 아닌 불법으로 많은 사람을 미혹할 것이라는 예언이 있다. 그 기록대로 초대교회의 진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교회에서는 태양신을 숭배하는 온갖 불법들이 난무하고 있다. 영적으로 흐리고 캄캄한 시대. 하나님의 양들은 참 목자가 없어 사방으로 흩어져 방황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목자들이 양들을 돌보는 것이 마땅한데, 오히려 자신들의 배만 채우고 일반인들도 금기시하는 여러 강력 범죄들을 태연하게 저지른다. 기독교 윤리 전문가들은 목회자들이 타락한 이유가 현세적이고 기복주의적인 신앙 추구와 관련이 깊다고 진단한다. 하나님을 중심에 둬야 할 기독교가 부, 권력, 명예만을 추구하는 현실이 영적인 비극을 만든 것이다.


위기에 처한 영혼들을 구조해야 할 목자들이 구조 활동은커녕 잘못된 가르침과 비윤리적인 행태로 많은 영혼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결국 초대 하나님의교회를 세우셨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목자 되어 다시 오실 수밖에 없었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며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내 양의 무리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의 무리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 …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로 누워 있게 할지라 …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에스겔 34:5~24)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목자 되어 양을 구하러 오신다고도 하였고, 한 목자가 다윗이라고도 하였다. 즉 하나님께서 다윗의 이름으로 오셔서 거짓 목자들을 다 벌하시고 위기에 처한 양들을 직접 구조하시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호세야 선지자도 말일에 다윗을 찾고 경외해야 하나님의 은총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예언하였다(호세아 3:5). 마지막 때 등장할 다윗은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말일에 당신의 양들을 구조하러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참 목자 그리스도는 어디에 계실까? 이것이 작금의 기독교에서 풀어야 할 최고의 숙제이자 인류에게는 마지막 희망의 실마리이다.


여호와께서 시온(하나님의교회)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하나님의교회) 거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시편 132: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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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하면 남녀 간의 로맨스를 떠올린다. 그러나 사랑은 한 가지의 유형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캐나다의 사회학자 존 리는 여러 문학적 자료와 광범위한 면접 자료를 토대로 사랑을 ‘6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첫 번째 유형으로 ‘열정적 사랑(Eros love)’을 제시했다. 주로 이상형을 만났을 때 첫눈에 반하며 연인 간의 불꽃 같은 사랑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 ‘유희적 사랑(Ludus love)’을 들었는데 이들은 사랑을 일종의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어떠한 사람과도 깊이 사랑에 빠지는 법이 없다. 또한 언제든지 다른 사람에게 떠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상대방이 바람을 피워도 쿨하게 눈감아준다.


세 번째는 ‘친구 같은 사랑(Storge love)’이다. 이 유형의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랑이 싹트는 타입이다. 친구처럼 오래 사귀면서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사랑이 무르익는다. 갈등이 생길 경우 평화롭게 타협하며 그것 때문에 사랑에 손상이 생기거나 끝나는 예는 드물다.


네 번째는 ‘소유적 사랑(Mania love)’이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여 상대방을 숨막히게 하는 과도한 집착을 보인다. 이들은 의존성과 질투심이 강하며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인을 상대에게 끊임없이 요구한다. 광신적 사랑이라고도 표현한다.


다섯 번째는 ‘실용적 사랑(Pragma love)’으로 서로의 환경과 배경, 취미 등 현실적 조건을 생각하는 타입이다. 쇼핑목록을 작성하듯 상대의 자질 요건을 구체화하고 또 그런 사람을 선택한다. 상대방에 대해 제대로 알기 전까지는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마지막 여섯 번째 유형은 ‘헌신적 사랑(Agape love)’이다. 아가페 사랑이라고도 한다. 아무 조건 없이 상대를 좋아하고 돌봐주며 용서하고 베풀어주는 타입니다.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무한한 사랑을 제공해 준다.

 


위 6가지의 유형 중 최고의 사랑은 단연 헌신적인 사랑, 즉 아가페 사랑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용어를 거룩하고 무조건적인 ‘예수님의 사랑’에 빗대어 불렀다고 한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한복음 10:15)


다른 사람을 대신해 선뜻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자는 없을 것이다. 상대가 의롭거나 착하더라도 그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의인도 선인도 아닌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으셨다(로마서 5:7~8).


인류의 죄는 죽음으로써만 해결할 수 있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의 고통을 감내하셨고 마침내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셨다(로마서 6:23). 사도 바울은 그러한 예수님의 헌신적인 사랑과 희생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에베소서 1:6~7).


우리 모두는 예수님께로부터 이기적이지 않으며 오직 자기 희생적인 사랑, 아가페 사랑을 받았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그 사랑에 보답하고자 열심으로 신앙하며 올리사랑을 실천하려고 애를 쓴다. 올리사랑이란 윗사람에 대한 아랫사람의 사랑을 나타내는 용어다. 즉 예수님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사랑을 가리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 (요한복음 14: 21)


성경은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고 기록했다. 반면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 하는 자’ 혹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없는 자’라고 기록했다(요한일서 2:4). 우리가 예수님께 대한 올리사랑을 실천하려면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계명은 이천 년 전 예수님께서 친히 알려주시고 본보여 주신 것들이다. 안식일이 되자 회당에서 성경말씀을 증거하셨고, 유월절 날 제자들과 함께 새 언약의 법도대로 떡과 포도주를 떼셨으며, 초막절에 성령을 받으라고 외치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행적들은 신약성경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누가복음 4:16, 마태복음 26:17~28, 요한복음 7:2, 14, 37~39).


예수님께 아가페 사랑을 받은 우리들. 말로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넘어, 이제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켜 올리사랑으로 보답해드려야 할 차례다.


<참고자료>
1. ‘아가페’, 위키백과
2. ‘사랑의 6가지 유형, 당신은 어떤 사랑?’, 시선뉴스, 2016. 9. 24.
3. ‘올리사랑’, 국어사전

 

 

 

 

 

 

 

 

 

 

 


 


로봇이 개발되면서 인류의 삶은 굉장히 윤택하고 편리해졌다. 사람이 하면 오래 걸리는 일도 로봇은 실수 없이 순식간에 해낸다. 사람이 잘 때도 로봇은 피로를 느끼지 않고 묵묵히 지시받은 일을 해낸다. 로봇이 산업에 활용되면서 생산성은 크게 상승하고 반대로 불량률은 줄었다. 이렇게 로봇 기술이 발달하면서 처음에는 쇳덩이에 불과했던 로봇의 외형도 많이 변화됐다.


최근 개발자들은 인간과 유사한 로봇, 이른바 ‘휴머노이드’를 개발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태권브이나 건담 등 두 발로 서서 두 손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로봇이 휴머노이드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의 모습과 어설프게 닮은 휴머노이드를 보면 강한 불쾌감을 느낀다고 한다. 이를 가리켜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라고 한다.


불쾌한 골짜기란, 로봇을 향한 인간의 호감도를 나타낸 그래프가 꾸준히 상승하다 어느 순간 급격한 하향 곡선을 그리는 모양이 골짜기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인간이 로봇에 대해 느끼는 호감도는 로봇이 얼마나 인간의 모습을 닮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들은 인간과 흡사한 모습을 하고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로봇에게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 그 두려움의 수준은 기괴한 행동을 하는 좀비, 시체 등을 볼 때 느끼는 불쾌감이나 두려움과 비슷하다고 한다.


2011년 미국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한 연구팀은 불쾌한 골짜기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한 가지 실험을 했다. 실험에 참가한 20명의 사람들에게 실제 사람, 인간과 아주 닮은 모습의 로봇, 내부가 그대로 드러난 기계식 로봇이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참가자의 뇌를 자기공명영상장치(MRI)로 촬영한 결과 실제 사람과 내부 골자가 다 드러난 로봇의 인사를 받았을 때는 비슷한 뇌의 반응이 일어났다. 하지만 인간형 로봇이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자 뇌 반응이 달랐다고 한다. 이에 대해 연구진들은 로봇의 모습이 인간과 비슷하지만 행위는 자연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뇌가 혼란을 느낀 것이라 설명했다.


겉모습이 사람과 유사하다 해도 행동이 부자연스럽다면 본능적으로 불편함과 거부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살펴봤다.

이런 현상은 종교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선지자인 양 거룩하게 포장하고 있지만 그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종교인이 너무 많다. 더욱 무서운 점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선지자는 불쾌함만 일으키는 로봇과 달리 우리를 파멸로 이끌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로 미혹케 하니 인도를 받는 자가 멸망을 당하는도다 (이사야 9:16)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마태복음 15:14)

 


이 세상에는 선지자인 척하는 ‘가짜’ 선지자들도 많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해치는 존재들이므로 주의해야 한다. 그럼 그들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 로봇이 인간을 ‘어설프게’ 닮으면 불쾌감을 유발하듯, 가짜 선지자들도 영적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는 어설픈 모습을 가지고 있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마태복음 15:7~9)

 


그들도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 그 모습이 너무나 그럴싸해서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분간하기가 어렵다. 무엇으로 참과 거짓을 분별해야 할까? 바로 성경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나 사람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을 꾸짖으셨다. 아무리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무리 많은 기적을 행해도 그가 지키는 예배와 계명이 성경에 없다면 그는 참 선지자가 아니며 그의 모든 행위는 헛수고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을 그대로 준행하길 원하신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에 사람의 생각을 덧붙이거나 삭제한다면 구원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요한계시록 22:18~19).


하나님의 선지자라면 당연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는 아니다.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겉모습만 그럴싸한 거짓 선지자들에게 불쾌함은커녕 호감과 경외심을 표출하고 있다. 거짓 선지자를 따라가면 그와 함께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만큼, 참과 거짓을 올바로 분별하는 지혜가 꼭 필요하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태복음 7:15)

 

 

<참고자료>
‘로봇과 인간의 ‘불쾌한 골짜기’’, KISTI의 과학향기 칼럼

 

 

 

 

 

출처 KBS1다큐

세상이 인정하는 성공한 맨유 감독의 사무실에 있는 사진이랍니다

신입들을 데려다가 이 사진을 보여주며 축구는 혼자가 아닌 함께하는것임을 교육한다네요~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을 살펴봐도 하나님의교회 어머니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있기에 성공한다는걸 깨닫게됩니다~






 

 

 

출처는 https://www.pasteve.com/?m=bbs&bid=bcircles&uid=4909

 

 


최근 어느 한의사의 ‘안아키 치료법’이 시사프로그램에 공개되면서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안아키란 ‘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라는 뜻이다. 그는 ‘안아키’ 인터넷 카페를 통해 “아토피 가진 아이에게 스킨과 로션을 바르지 말고 햇볕을 쬐라”, “화상을 입은 아이에게 뜨거운 물로 찜질해라”, “장염에는 숯가루를 먹여라”, “체온이 40도가 넘어가도 해열제를 먹이지 말라”는 등의 비상식적인 치료지침을 올렸다. 수많은 회원들에게 약 대신 숯가루, 소금물, 간장 등을 사용하라는 정보를 제공했다.


이같은 의학정보(?)에 따라 한 회원은 중이염을 앓는 아이에게 간장을 희석해 비강세척을 시켰다고 한다. 또 한 회원은 진물이 흐르고 심각한 흉터가 생기도록 아이의 아토피를 방치시켰다. 참다 못한 회원의 남편이 언론에 고발하여 아이의 모습이 공개됐는데, 거의 반신실해 있는 상태였다.


한 회원은 “병원의 백신보다 자연 면역된 항체가 더 큰 효과가 있다”는 글을 게시했다. 안아키에 몰두하고 있는 한 주부는 수두에 걸린 아이를 불러 파티를 여는 일명 ‘수두 파티’를 통해 13개월 된 자신의 아들에게 자연스럽게 수두를 옮기겠다고 한다. 이들의 특징은 극단적인 자연주의 치유를 내세워 병원 치료 및 백신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시민단체는 “극심한 고통을 겪는 아동에게 의료적 처지 없이 방치하거나 민간요법으로 아동을 위험에 빠뜨리는 행위는 아동학대”라고 꼬집었다.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발생시킨 안아키 현상은, 오늘날 종교계에 만연한 영적 안아키를 떠오르게 한다.

이천 년 전, 의원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사망이라는 질병에 시달리는 인류에게 영생의 처방을 내려주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 (요한복음 6:53~55)
예수의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19~28)

 


인류는 70~80년을 살아가는 동안 즐거움과 고통, 온갖 질병에 따른 괴로움 속에서 허덕인다. 그러다가 사망이라는 종착지에 다다른다. 이같은 공식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렇다면 사람이 태어나서 죽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도 바울은 하늘에서 지은 죄의 대가로 인한 것이라고 기록했다(로마서 6:23). 다행히 인류가 지은 죄는 사면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새 언약 유월절 떡과 포도주를 먹는 것이다. 새 언약 유월절을 통해 예수님께서 죄 사함을 허락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는 새 언약 유월절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유월절을 지키면 이단이라고 비난한다.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영생의 처방을 업신여기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닌 태양숭배사상에서 비롯된 일요일예배와 크리스마스를 지키며 영생을 바란다. 마치 정상적인 치료를 무시한 채 터무니없는 방법으로 병을 고치려는 안아키 신봉자들과 같다.


병을 고치려면 정확한 병명에 따른 처방이 필요하다. 화상을 입으면 화상치료를 받아야 하고, 고열은 해열제로 내려야 하며, 아토피는 천식과 비염, 심혈관질환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에 초기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죄로 인해 죽음이라는 고질병을 가지고 태어난 인류는 ‘새 언약 유월절’로 영생의 처방을 받아야 한다. 부디 허무맹랑한 이상한 치료법에 혹하지 말고 참 의원이신 예수님의 처방대로 행하자.


<참고자료>
1. ‘“안아키 사태에 WHO 구성원들도 충격”’, 동아일보, 2017. 6. 26.
 2. ‘무분별한 ‘안아키’를 멈춰주세요.’, 브릿지경제뉴스, 2017. 5. 2.
 3. ‘'안아키', 의료법위반 처벌될듯…아동학대 '무혐의'’, 머니투데이, 2017. 7. 10.
 4. ‘엄마는 왜 안아키가 됐을까’, 동아일보, 2017. 7. 13.
 5. ‘자녀 일부러 수두 걸리게 하는 부모들’, 조선일보, 2016. 9. 23.

 

 

 

 

 

 

 

 

 

 

 

출처는

http://www.hankookilbo.com/v/75a3cfc1c62b4cda937045890f3c644e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는

23일 새예루살렘 판교성전에서 외국인 유학생 초청행사를 개최했다고 24일 밝혔다.

이날 행사엔 미국, 영국, 캐나다, 러시아, 일본 등 30여 개국에서 한국으로 유학온 대학생 500여명이 참석했다.

행사는 어머니를 주제로 한 세미나와 전시회, 한국 전통문화 체험 등으로 진행됐다.

하나님의 교회 대학생들이 직접 진행한 ‘Our Mother(우리 어머니)’ 세미나는

타국 대학생활의 어려움을 겪는 유학생들에게 힐링의 기회를 제공했다.

또 국내에서만 60만명이 관람한 ‘우리 어머니’ 글과 사진전도 함께 열었다.

이 밖에 태권도 품새 배우기, 한글 배우기와 한복 체험, 젓가락으로 콩 옮기기, 제기차기, 딱지치기, 투호 체험 등

유학생들에게 한국문화의 체험 기회를 제공했다.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 관계자는

 “고국을 떠나 한국에서 생활하는 외국인 유학생들의 고충을 위로하고 어머니 사랑의 힘과 용기를 나누는 자리였다”고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3200여 년 전 종교가 중심이 되는 고대 이집트의 한 도시가 있었다. 그곳은 ‘헬리오폴리스’라고 불리는 도시인데, 오늘날 카이로 북동쪽 교외에 위치한 곳이다. 주목할 점은 하나님께서 헬리오폴리스를 거론하시며 그곳에 심판을 예고하셨다는 것이다.


이집트의 헬리오폴리스의 주상을 깨뜨리고 이집트의 수많은 신전에 불을 지를 것이다 (현대인의 성경, 예레미야 43:13)


헬리오폴리스(벧세메스)는 태양신을 숭배했던 가장 오래된 도시다. 헬리오폴리스라는 뜻 자체가 ‘태양의 도시’라는 의미를 갖고 있을 정도로 그곳은 태양신앙의 중심지였으며, 그곳 사람들은 태양신을 신실하게 섬겼다. 눈여겨볼 점은 신전 앞에 주상, 즉 돌기둥이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그 돌기둥을, 하나님께서는 가차없이 깨뜨려버리라고 말씀하셨다. 과연 이집트인들이 태양신앙으로 숭배했던 돌기둥은 무엇이었을까.


『동아 대백과사전』은 고대 이집트 왕조 때 태양신앙의 상징으로 세워진 기념비가 있는데 이는 오벨리스크라고 설명했다. NRSV 성경도 이집트인들이 세운 돌기둥이 ‘obelisks(오벨리스크)’라고 기록했다. NASB 성경은 ‘obelisks of Heliopolis(헬리오폴리스의 오벨리스크)’라고 기록했다. 아가페 성경사전 역시 헬리오폴리스에 세워진 주상은 오벨리스크라고 밝혔다. 즉 고대 이집트인들이 태양신앙으로 숭배했던 돌기둥은 오벨리스크였던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헬리오폴리스의 태양 신전 앞에 있어야 할 오벨리스크가, 현재 바티칸 성당 한복판에 서있다는 것이다. 어찌된 일일까.


이집트의 오벨리스크가 처음 로마에 옮겨진 시기는 기원전 30년경, 이집트를 정복한 아우구스투스 때다. 『로마 제국 쇠망사』에 따르면 당시 오벨리스크는 권력과 승리를 나타내는 기념물로 여겨졌다고 한다. 이에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그것을 로마에 옮겨오길 원했고 즉시 실행했다. 역사가들은 “거대한 돌기둥인 오벨리스크를 운반하기 위해 특수 설계한 큰 선박을 만들었으며 수많은 인력과 기술을 동원하여 그것을 로마의 원형경기장에까지 운송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던 1586년 교황 식스토 5세가 원형경기장에 있던 오벨리스크를 성당 중심 광장으로 옮겨 세우라고 명령했다. 이에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공사에 동원되었고, 백 필이 넘는 말과 약 오십 개의 도르래, 수많은 밧줄이 사용되었다.


한국일보에 따르면, 작업자들이 밧줄을 당기면 그 밧줄은 도르래를 통해 오벨리스크를 천천히 들어올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작업을 하던 중 밧줄이 끊어질 뻔하여 큰 인명피해가 날 뻔한 상황도 있었다.


더욱이 당시 공사장에는 각처에서 구경하기 위해 몰려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에 교황은 구경꾼들에게 아무 소리도 내지 말라고 명령했다. 만약 명령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사형’에 처한다는 엄포도 놓았다. 그들의 웅성웅성한 소리 때문에 오벨리스크를 세우지 못할까 염려한 것이다.


약 5개월 동안 뜨거운 태양 아래서 수많은 작업자들이 목숨을 내걸고 공사한 결과, 약 350톤의 무게를 자랑하는 돌기둥이 들어올려졌다. 현재 성베드로성당에 있는 오벨리스크가 그것이다.


오벨리스크의 비문에는 태양신을 찬양하는 내용이 상형문자로 새겨져 있다고 한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했던 이집트 왕을 기리는 업적들도 기록되어 있다. 한 이탈리아 저술가는 오벨리스크의 본질이 태양숭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로마 가톨릭교회가 잘 알고 있다고 얘기했다.


그렇다면 왜, 가톨릭은 오벨리스크를 바티칸 중심부에 떡 하니 세운 것일까. 수많은 인력을 동원시키고, 사람들에게 사형을 선포하면서까지 세워야 할 만큼, 태양신앙의 상징물이 중요한 요소였던 것일까.


속내야 어떻든, 옛적 오벨리스크를 세웠던 고대 이집트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진노하셨는지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이집트에 있는 태양신전의 석탑들을 부수고, 이집트의 여러 신전에 불을 놓으리라 (공동번역, 예레미야 43:13)


<참고자료>
1. ‘주상’, 아가페 성경사전
2. ‘헬리오폴리스’, 두산백과
3. ‘성 베드로 광장’, 위키백과
4. ‘아쿠아 알레 푸니’, 한국일보
5. ‘로마 제국 쇠망사’, 에드워드 기번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계절이다. 그로 인해 몸과 마음이 지치기 십상이다. 그러다 보니 무더위를 날려보낼 수 있는 시원한 곳은 각지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이기 마련이다. 무더운 여름을 위한 휴가지로는 뭐니 뭐니 해도 탁 트인 바닷가가 제격일 것이다.


그런데 바다에는 우리가 잘 모르는 한 가지 무서운 규칙이 있다. 이름하여 ‘이안류(離岸流)’라는 해류의 규칙이다. 언론을 통해 종종 해안가에 있던 사람이 파도에 휩쓸려 실종되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 비극이 일어나는 이유는 해안가에서 바다 쪽으로 빠르게 휩쓸려가는 이안류 때문이다.


파도는 대개 바다에서 해안가로 밀려오지만 이안류는 해안가에서 바다 쪽으로 급하게 흘러나간다. 그래서 ‘역파도’라고도 불린다. 우리나라에서 이안류가 자주 일어나는 장소로는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을 꼽을 수 있다. 최근 3년 동안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200여 명이 이안류에 휩쓸렸다가 구조됐고, 미국에서는 1년에 200명에 가까운 사람이 이안류에 휩쓸려 목숨을 잃는다고 한다.


이안류가 발생하는 해안가는 뭍에 사는 인간에게는 매우 위험한 자연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만약 그 육지가 마치 지옥과 같은 곳이라면 어떨까? 그 육지를 탈출하고 싶은데 감시는 삼엄하고 그곳을 탈출할 수 있는 배도 없는 상황이라면 해안가에서 바다 쪽으로 휩쓸려나가는 이안류야말로 자유를 향한 유일한 탈출구가 될 것이다. 엉뚱한 발상이라 치부할 수 있겠지만 놀랍게도 이안류를 이용해서 자유를 향한 처절한 몸부림을 쳤던 한 사람이 있다. 바로 빠삐용이다.


빠삐용은 영화를 통해 일반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1973년 프랭클린 J. 샤프너 감독의 작품 ‘빠삐용’은 살인죄의 누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몇 번의 시도 끝에 마침내 탈출에 성공하는 프랑스의 무기수 앙리 샤리엘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프랑스어로 나비가 빠삐용(papillon)인데, 그의 가슴에 나비 문신이 있어서 ‘빠삐용’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빠삐용은 친구 드가와 함께 여러 차례 탈옥을 감행한다. 그때마다 탈옥에 실패했고, 그들은 결국 탈옥이 불가능해 보이는 섬으로 끌려간다. 악마의 섬이라 부르는 섬 근처에는 상어가 우글거리고 파도가 너무 심했기 때문에 탈출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빠삐용은 끊임없이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를 바라보며 자유의 그날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는 날마다 해안 절벽에 앉아 섬으로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며 탈출할 방법을 찾는다. 그리고 마침내 거칠게 출렁이는 파도 속에서 자신에게 아주 유리하게 작용할 ‘규칙’을 발견한다. ‘이안류’가 그것이다.


빠삐용은 파도를 바라보며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결과 파도가 일곱 번의 주기로 바뀌며, 그중 가장 강한 일곱 번째 파도가 칠 때 그 이안류를 타고 섬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영화는 코코넛 자루를 타고 망망대해로 사라지는 빠삐용의 모습을 잠시 보여주며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으로 끝을 맺는다.

“빠삐용은 자유를 얻었다. 그리고 여생을 자유의 몸으로 살았다. 이 악명 높은 기아나의 감옥도 그를 굴복시키진 못했다.”


빠삐용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발견했던 것이 이안류의 규칙이었다. 악마의 섬 쪽으로 늘 거칠게 다가오는 파도 속에서 일곱 번째마다 발생하는 이안류의 법칙을 발견하고, 그 규칙에 몸을 실어서 빠삐용은 드디어 악마의 섬을 탈출하여 자유를 얻게 되었다.

 

 

 

 

 

나 여호와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었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규정하였고 바다를 격동시켜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내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내가 말하노라 이 규정이 내 앞에서 폐할진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폐함을 입어 영영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 (예레미야 31:35~36)

 


낮과 밤과 바다의 파도 치는 것을 규정 즉 규칙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학창시절에 배웠던 기억을 되살려보면 지구와 달의 인력으로 밀물과 썰물이 발생한다. 그로 인해 파도가 치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규정이라고 하였고, 또 규례라고 하였다.

 

 

천지가 주의 규례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연고니이다 (시편 119:91)

 


빠삐용이 발견한 이안류의 규칙은 바다를 격동시켜 파도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역사(役事)이며 천지의 규례다. 이안류의 규례가 빠삐용에게는 자유의 세계로의 탈출구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범죄한 천사들의 감옥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하늘에서 죄를 범하고 이 땅으로 쫓겨났다. 형무소인 이 땅에서 살아가며 인생들은 죄의 사슬을 풀지 못한 채 사망의 두려움에 매여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형수들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연약한 육체에는 서서히 질병과 가난과 고독이 깃든다. 사망의 두려움이 조여오는 불안하고도 절망적인 상황에서 인생들에게 영원한 자유의 세계로의 탈출구는 어디에 있을까?


하나님께서 해와 달과 파도에게 규정과 규례를 허락하셨다. 낮과 밤이 번갈아 임하면서 인생들에게는 일자와 연한이라는 규칙이 정해진다. 악마의 섬으로 들이치는 수많은 파도 중에서 특별한 이안류의 규칙이 있었던 것처럼 인생들에게 임하는 많은 일자와 연한 중에서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규칙인 일곱째 날 안식일과 유월절을 비롯한 하나님의 절기를 규례로서 허락하셨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의 성소를 공경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너희가 나의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내가 너희 비를 그 시후에 주리니 땅은 그 산물을 내고 밭의 수목은 열매를 맺을지라 … 너희가 음식을 배불리 먹고 너희 땅에 안전히 거하리라 (레위기 26:2~5)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누가복음 4:16)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 너희는 이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지니라 (출애굽기 12:12~14)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유월절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 제자들이 예수의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마태복음 26:17~19)

 



영원한 자유의 세계로 향하는 모든 것이 사방으로 막혀있고, 사망이 지배하는 이 외딴 행성 지구에서 하루하루 삶의 파도가 들이치고 있다. 사방이 가로막힌 절망의 섬으로 들이치던 파도에 그 섬을 탈출할 수 있는 이안류의 규칙이 있었던 것처럼 이 절망적인 세상에서 영원한 자유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안식일과 유월절 등의 규례와 법칙을 알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기쁘고 놀라운 일인가?


빠삐용은 이안류의 규칙에 몸을 맡겨 자유의 몸이 되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일곱째 날 안식일과 유월절을 비롯한 하나님의 절기에 우리의 몸을 맡기면 될 것이다. 그 특별한 규례와 법칙이 우리를 영원한 자유의 세계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의 나래를 펴는 그날을 소망하며 오늘도 나는 절기를 지키러 즐거운 몸부림을 치며 나비처럼 날아서 시온에 간다.

 

 

 

 

 

 

 

 

 

 

 

 

http://www.kgdm.co.kr/news/articleView.html?idxno=482060

 

이날 ‘성공한 사람보다 가치 있는 사람이 되라’는 주제로 본격적인 인성교육이 시작됐습니다.

김주철 목사는 “성공한 사람이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니라 가치 있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라며

성경 내용을 기준으로 학생들이 실생활에서 가치 있는 삶을 위해 실천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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