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요 - "미안해요"라는 말은 겸손에서 일어나는 마음이다!

미안해요 - "미안해요"라는 말은 겸손에서 일어나는 마음이다! │ 미안하다는 고백의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매우 크다.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미국 외과의사 다스 굽타(Das Gupta)가 성공한 이면에는 "미안하다"는 사과를 잘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회(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 성도들도 미안해요 운동을 하고 있다. 감동적인 실화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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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교회, 미안해요 운동 실천


가정에서든 사회에서든 누군가 상처를 줄 의도가 전혀 없었음에도 상대방이 상처받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고 받는 일은 교회 안에서도 발생한다. 몇 년 전, 인도에 있는 한 하나님의 교회에서 일어난 실화다. 식구의 작은 허물로 인해 상처를 받은 한 성도가 있었다. 마음이 상한 성도는 오랫동안 교회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교회 사모는 무언가 결심한 듯 상처받은 식구의 집에 방문했다. 퉁명스럽게 맞는 식구에게 사모는 몸을 낮췄다. 그리고 식구의 두 손을 잡고 위로하며 무릎을 꿇었다.

“미안해요. 그 아픈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 저를 용서하세요”

사실 사모가 식구에게 상처를 준 건 아니었다. 사모가 사과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 식구를 대신해 무릎 꿇고 진심으로 사과했다. 사모라는 지위나 체면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식구를 하나님의 품으로 다시 인도해 살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예상치 못한 사모의 사과에 놀란 식구는 사모를 얼싸안고 한참 울었다. 그리고 마음을 추스른 후 다음과 같은 말을 건넸다.

“고마워요. 상처 받은 내 마음을 보듬으러 먼저 찾아와 주셔서요.”

식구는 몸을 낮추고 자신의 손을 잡아주는 사모에게서 어머니 하나님의 사랑과 따뜻함이 느껴졌다고 덧붙였다. 지금은 상처를 다 씻고, 오해도 풀었다. 그리고 교회에서 새 언약 진리를 지키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초대교회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를 통해 한 영혼이 얼마나 귀한지 교훈해 주셨다(누가복음 15:3~10). 상처로 인해 잃어버린 식구를 되살린 것은 어떤 물질이나 기술이 아니었다. 진심이 담긴 “미안하다”는 한마디 말이었다. 이처럼 사과는 한 영혼을 살릴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아픔과 분노를 잠재우고 사랑으로 연합하게 만든다. 이보다 놀라운 일이 또 있을까.

 

 

 

사랑의 진리, 새 계명과 새 언약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3:34)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누가복음 22:15~20)

성력 1월 14일 저녁, 이날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받기 전날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유월절 새 언약을 베푸시며 죄 사함과 영생을 약속하셨다(마태복음 26:17~28). 이날 선지자 누가와 요한은 같은 장소에 있었다. 즉 누가(Luke)가 잔(포도주)을 가지고 새 언약이라고 기록한 장소도 유월절 성만찬을 행하던 곳이었고, 요한(John)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곧 새 계명이라고 기록한 장소도 유월절 성만찬을 행하던 곳이었다. 새 언약은 새 계명이라는 뜻이다(출애굽기 34:28, 신명기 4:13).

그렇다면 ‘유월절’과 ‘서로 사랑하는 것’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가라사대 ··· 유월절을 예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누가복음 22:8~20)

유월절의 떡은 예수님의 살을, 유월절의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유월절을 통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은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서 한 몸이 되는 것이다(고린도전서 10:16~17). 세상에 자기 몸을 미워할 사람은 없다. 예수님의 살과 피가 내 안에 흐르고 네 안에 흐르고 있기에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 천국가는 날을 앞당겨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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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그림이라하면

유유자적한 자연을 담은 모습이나

아이들의 뛰어노를 모습같은걸 떠올리실텐데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느낌...

 

 

 


 

옛날 한 나라의 왕이 있었다. 그의 마음은 늘 불안하여 조마조마했다.
하루는 왕이 화가들을 불러 ‘가장 평화로운 그림’을 잘 표현한 이에게 상금을 주겠다고 말했다.
화가들은 각자 성의를 다해 평화를 묘사했다. 그 가운데 최종적으로 두 개의 작품이 뽑혔다.

 

한 작품에는 투명한 호수, 부드럽게 흐르는 시내, 양떼들이 풀을 뜯는 목장의 넓은 들판이 있었다.
귀퉁이에는 새들이 노래하고, 아이들이 즐겁게 놀고 있으며, 몽실몽실 흰 구름도 떠다닌다.
고요함과 아름다움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풍경이었다.

 

작품을 감상한 왕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깊은 평안으로까지 이끌진 못했다.

나머지 한 작품을 본 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한동안 그것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한가운데 바위를 중심으로 거친 폭풍우가 몰아치고, 파도는 소용돌이를 만들어 성이 났다.
거칠게 성이 난 파도에 곤경에 처한 배 한 척도 보인다.
하늘의 짙은 먹구름은 폭풍을 더 사납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바다 중심에 있는 바위 꼭대기 조그만 틈새에, 새 한 마리가 조용히 둥지를 틀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어미 품에 안긴 어린 새들이 있었다.
어린 새들은 주변에 무슨 일이 있느냐는 표정으로 평온하게 어미 날개에 덮여 있었다.

상금은 후자의 작품을 묘사한 화가에게 돌아갔다.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어미 품에 안긴 새끼의 모습이, 가장 안전하고 평화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시온성을 바라보라. 예루살렘은 살기에 평화로운 곳이 되어 말뚝이 뽑히지 않고 밧줄이 끊어지지 않아 옮겨지지 않을 천막과 같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능력이 되시므로 그 곳은 ··· 피난처와 같을 것이다. ··· 시온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병들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며 ··· 죄에 대하여 다 용서받을 것이다. (현대인의성경 이사야 33:20~24)

 

날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듯한 재앙이 끊임없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하나님의교회야말로 평화로운 모습니다~

 

 

출처는 https://pasteve.com/the-most-peaceful-picture/

 

 

 


사회적 마타도어

 

붉은 천을 휘두르는 투우사의 현란한 손놀림에 황소는 흥분한다. 돌진하는 황소의 등에는 여러 개의 창이 꽂힌다. 그리고 마지막 한 개의 창. 예리한 칼날이 황소의 정수리를 찌르자 사납던 소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만다. 스페인의 국기(國技) 투우다.

투우를 에스파냐어로 마타도르(Matador)라고 한다. 이 단어에서 유래된 마타도어는 근거 없는 사실을 조작해 상대방을 중상 모략하는 흑색선전(black propaganda)을 뜻한다.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요인 중 하나인 마타도어는 근거가 없다는 특징이 있다. ‘카더라 통신’을 타고 마구잡이로 뿌려지는 마타도어는 상대에게 치명타를 입힌다.

마타도어에 당한 사람은 그 내용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큰 상처를 입게 된다. 마타도어는 ‘아니면 말고’ 식으로 유포되다 보니 누구에게 책임을 묻기도 어렵다. 해명을 하는 당사자만 치졸해보일 뿐이다.

요즘 세상에는 수많은 마타도어가 떠돌아다닌다. 학교 학생들 사이에서도, 어른들의 크고 작은 모임에서도 발생한다. 특히 SNS를 통해 개인, 기업인, 정치인 등에 관한 가짜 뉴스와 혐오발언들이 수없이 쏟아진다. 한 화장품 회사의 기업 대표는 “우리 제품을 사용한 후 하혈을 했다는 괴소문이 인스타그램에 퍼졌다”며 “그들은 절대 잡히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괴담을 퍼트리고 있다”고 토로했다. 사실 여부조차 파악할 수 없는 이 같은 루머들은 많은 사람에게 사실인 양 각인된다. 그리고 광범위하게 퍼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결국 당사자는 사실 여부와 상관 없이 난처한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종교적 마타도어

 


종교인의 마타도어 역시 고질적인 병폐 중 하나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500년이 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종교적 마타도어는 사람들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있다.

성경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기록했다(출애굽기 20:8). 2천 년 전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께서도 안식일을 지키시며 본을 보이셨다(누가복음 4:16, 요한복음 13:15). 사도들도 그 가르침대로 안식일을 준행했다(사도행전 17:2, 18:4).

반면 일요일 예배는 성경에 없다. 사람이 만든 사람의 계명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오래된 신앙경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사람의 계명을 지켜서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마태복음 15:9). 성경에 없는 것을 가르치는 목사의 입장은 난처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교리 대신 엉뚱한 것을 겨냥한다. 바로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인성(人性)이다.

 

 


하나님의 인성을 겨냥한 마타도어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마태복음 11:18~19)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요한복음 10:30~33)

2천 년 전 예수님께서는 새 언약 복음을 전파하시며 당시 기득권 세력이었던 유대교인들을 꾸짖으셨다. 이때 교리적으로 도저히 예수님을 당할 수 없었던 유대교인들이 고안해낸 것이 바로 마타도어였다.

마타도어의 목적이 흠집 내기인 만큼 그들은 어느 정도 목적을 달성했다. 예수님을 ‘나사렛 이단’으로 낙인찍어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 말이다(사도행전 24:5, 누가복음 23:21). 그러나 진리는 마타도어에 의해 바뀌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자신들의 손으로 하나님을 못 박은 그들의 행위는 참으로 어리석기 그지없다.

오늘날 성령시대,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예언대로 오랫동안 지키지 못했던 새 언약 진리를 다시 알려주시기 위해 사람 되어 이 땅에 두 번째 오셨다(히브리서 9:28, 이사야 25:6~9, 요한계시록 3:20). 하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이 될 수 있느냐”며 배척한다. 애초에 성경을 통해 알아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재림 예수님에 대한 온갖 거짓 소문과 악성 루머를 퍼뜨린다. 2천 년 전 유대인의 모습과 동일하다.

영적 마타도어에 빠지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을 믿고도 ‘멸망’이라는 참담한 결과를 맞지 않으려면 신앙의 중심을 오직 성경에 두어야만 한다.

 

<참고자료>
‘그들만의 위험한 축제, 까판을 아시나요?’, 이코노믹리뷰, 2018. 8. 7.

 

출처는 https://pasteve.com/matad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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