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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라 하면 성경에 관심 없는 비(非)기독교인들조차 십자가의 수난을 먼저 떠올린다. 2천 년의 장구한 세월이 지났지만 예수님의 고통은 ‘인류를 위해 대신 피 흘리신 고결한 희생’으로 여전히 기억되고 있으며, 대가 없는 사랑의 대명사로 일컬어지고 있다.


예수님의 희생과 인류의 구원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희생을 감내하면서까지 예수님께서 인류에게 남긴 약속이란 과연 무엇일까? 2천 년 전 역사 속으로 들어가 확인해보자.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유월절을 앞두고, 성경의 기록대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 그리스도. 백성들은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환영한다.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소경과 다리 저는 자들을 고치시고 말씀을 가르치시며, 대제사장들은 물론 장로, 바리새인, 사두개인 들의 불법과 외식을 꾸짖으신다.


예수님 등장 후 곤란에 처하게 된 대제사장 무리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저에서는 ‘나사렛 이단’을 해하려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계략을 꾸미는 일까지 벌어진다.


그즈음, 열두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을 찾아가 예수님을 넘겨줄 방책을 의논한다. 예수님을 잡을 방법을 고심하던 그들은 기뻐하며 유다에게 은전 30냥을 건넨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이들에게 넘겨줄 기회를 엿본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누구든 예수의 거처를 알면 고하여 잡게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수난 전의 만찬


 유월절 당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월절을 지킬 장소를 예비하라고 명하신다. 말씀하신 대로 한 다락방에 자리가 마련되고, 저물녘에 이르러 예수님이 그리로 향하신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다.”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주시며 겸손과 섬김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은, 모두 둘러앉은 자리에서 떡과 포도주를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신다. “이것은 내 몸이요 이 잔은 죄 사함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는 말씀과 함께.


예수님은 이 자리에서, 사랑하는 제자 중 한 사람이 배신할 것과 모두가 자신을 버리고 흩어질 것을 미리 알리신다. 주를 위해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했다고 호언장담하는 베드로에게는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가장 처절한 고난을 앞둔 순간, 예수님은 철저히 고립되고 있었다.

 

고난의 시작


 예수님은 제자 몇 명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발걸음을 옮기신다. 잠시 후 닥칠 고난에 고민하시며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잠들어 깨어날 줄 몰랐다.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소서.”


예수님이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방울이 핏방울같이 된다.


같은 시각,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과 장로 들이 파송한 큰 무리와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다다른다. 유다는 자신이 먼저 입 맞추는 자를 잡으라고 군사들과 사전에 군호를 짜놓은 상황이었다. 각본대로 유다가 예수님께 나아가 “랍비여, 안녕하십니까” 하고 입을 맞추자 무리가 예수님을 사로잡는다. 제자 중 하나가 급히 검을 빼서 맞서지만 예수님이 만류하신다.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친다. 군대와 유대인 하속들은 예수님을 결박해 가야바의 장인이자 대제사장 중 하나인 안나스에게 끌고 간다. 심문을 마친 안나스는 예수님을 가야바에게로 보낸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거짓 증거를 찾는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제대로 된 증거를 찾지 못하던 중,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말하라”는 대제사장의 추궁에 예수님이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볼 것이다”라고 답하신다. 대제사장이 옷을 찢으며 소리친다.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증인을 더 요구할 필요가 없다.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다!”


무리는 “사형에 해당한다”며 맞장구친다. 예수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기도 한다.

 

“다 이루었다”


새벽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관정으로 끌고 가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고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한다”며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고소한다.


당시 유대 사회는 자치적인 사법제도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사형 집행권은 없었기 때문에 로마 총독의 승인이 필요했다. 빌라도가 죄를 찾지 못하고 예수님을 돌려보내려 하지만 무리는 “갈릴리에서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가르치고 선동한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빌라도가 유월절에 죄인 한 명을 풀어주는 전례에 따라 예수님과 죄수 바라바 중 누구를 풀어줄지 유대인들에게 묻는다. 바라바는 민란을 꾸미고, 민란 때의 살인죄로 붙잡힌 죄수였다. 유대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죄 없는 예수님 대신 극악무도한 살인자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요구한다. 예수님을 놓아주려 애쓰던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격앙된 반응에 두려움을 느끼며 결국 예수님을 재판석에 앉힌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유대인들의 요구는 그칠 줄 모른다. 이유를 물어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더욱 크게 고함칠 뿐이다. 민란이 날 듯하자 빌라도가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외친다. 백성들이 자신만만하게 소리친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시오!”


빌라도는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여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준다. 군병들은 가시로 관을 엮어 예수님의 머리에 씌우고 조롱하며 침 뱉고, 손바닥으로 때리고, 갈대로 머리를 친다. 희롱을 끝낸 병사들이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다시 예수님을 끌고 간다.


오전 9시경, 군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십자가는 중죄인을 다스릴 때 사용되던 사형 도구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십자가형을 가리켜 ‘죄인을 공개적으로 비하하기 위해 고안한 가장 끔찍한 죽음’이라 표현했다. 영국의 유대계 작가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는 ‘열사병, 굶주림, 질식, 충격, 갈증을 통한 느린 죽음’이라 기록했다.


극심한 통증이 예수님을 서서히 옥죈다. 행인들은 고통에 신음하는 예수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며 모욕한다. 대제사장들도 무리와 함께 “저가 남은 구원하면서 자기는 구원할 수 없구나.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고 조롱한다.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이 어두워진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내가 목마르다”고 이르신다.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댔다. 이를 받으신 후 “다 이루었다” 하시고 비로소 머리를 숙이신다.

 

예언의 역사 속에 감추어진 비밀, 새 언약


 언뜻 보기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으므로 구원의 계획이 실패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우연도 아니고 정황상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도 아니다.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보여주신 하나하나의 과정은 이미 창세전에 예정되었던 구원의 경륜이고,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였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부터가 그렇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은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스가랴 9:9)라는 말씀의 성취였다.


유월절에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나눠주시며 “이것은 내 살과 피”라고 언급하신 것에도 숨겨진 비밀이 있다. 이 역시 구약의 역사와 예언을 따른 것이다. 출애굽 당시 지킨 최초의 유월절에는, 일 년 되고 흠 없는 어린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예식이 있었다. 이를 행한 백성들은 어린양의 희생을 힘입어 재앙을 면하고 400여 년간 종살이했던 애굽에서 해방받았다. 이 같은 역사를 따라 이 땅에 ‘어린양’(요한복음 1:29)으로 임하신 예수님은 인류를 속박하는 죄와 사망의 사슬을 끊으시려 자신의 피에 죄 사함과 구원을 약속하셨다. 그 약속이 바로 새 언약이다(누가복음 22:19~20). 약속을 이행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의 피 흘리는 고통을 마다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때로부터 2천여 년이 지났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구약 성경에 빼곡히 기록된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이 패배가 아닌 승리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혈로써 맺어주신 새 언약의 유월절은 알지 못한다. 폐지되어버린 율법이라 치부하기도 하고, 진짜 중요한 것은 믿음이지 행위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그들의 모습에서 2천 년 전 유대인들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은 어째서일까.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너희를 위해 살이 찢기고 피를 흘려야 하는 십자가 고통을 참아내겠다’는 다짐과 의지가 깃들어 있다. 예수님의 가없는 사랑과 희생에 감복하면서도 유월절에 담긴 축복과 구원을 간과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인상 깊게 보면서도 유월절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이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예수님의 간곡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참고자료>
『예루살렘 전기』(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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